타미 응우옌(Tammy Nguyen)과의 스튜디오 비지트(줌 통화) 이후

객체로서의 주체, 혹은 주체로서의 객체

스튜디오 비지트에 대해 쓰기에 가장 좋은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줌 통화 이후로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다. 타미가 다가오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몇 달 전에 아이를 출산했다고 말했을 때, 알렉산드리아가 타미에게 (농담이지만 존중하는 태도로) 타미가 많은 것들을 ‘출산’해왔다고 말했다. 여러 작품들을 만들었고 아이도 낳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한동안 붙잡고 있었다. 최근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한 번도 무언가를 ‘출산’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내가 출산을 걱정하며 살아본 적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술가로서도, 최근의 내 작업들은 내 몸에서 나온 결과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것들을 내가 만든 창조물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올여름에 깨달음을 얻었던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혼자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번역·언어·말하기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어떻게 회화 작업에 반영되는지 탐구해왔다. 올여름 이전까지 내가 도달한 가장 멀리 간 지점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는 회화 절차인 혼자말을 구축한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혹은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캔버스에 자국을 남기고, 듣는 사람(혹은 읽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림에서 물러나 방금 내가 한 행동을 이해하려 한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 과정에 타이머를 설정해, 한 시간은 쓰고 한 시간은 읽도록 스스로에게 강제했다. 이렇게 하나의 회화 위에서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레이어가 쌓이고, 내가 (쓰기와 읽기 사이에서) 놓이는 맥락 또한 변화했다. 작가와 독자는 매번 새로운 맥락에 위치하게 되고, 한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의 ‘번역’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나는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들은 것에 기반해 또 다른 말을 하고…”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를 계속 번역하고 있었다.

혼자말을 수행할 때, 나는 내가 스스로와 대화한다고 믿었다(다른 맥락에 놓인 또 다른 버전의 나와). 그리고 회화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산물처럼 생성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난여름 나는 이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와 대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읽기 세션 동안 나는 그림(혹은 물감 자체)이 어떻게 움직이길 원하는지를 신중하게 이해하려 애썼다. 이것은 마치 우리집 고양이 프레디와 대화를 시도하며, 프레디가 왜 내게 등을 비비는지 알아내려 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받았고, 그 반응을 해석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해석에 기반해 다시 반응했다. 나는 내가 ‘혼자말’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나와 그림 사이에서 주고받은 반응의 연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의 ‘의지’를 나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그림 또한 내 의지에 반응한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인식은 그림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그림을, 단순히 미술가의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아닌, 미술가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수행자(perfomer)로 보고 있다.

다시 타미의 작품을 ‘출산’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말로 돌아가자면, 내가 지금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주체를 ‘출산’한다는 것은 꽤 이상한 상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고양이를 ‘출산’한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작업하는 알루미늄 판은 물감이 닿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온다. 그것은 전능한 미술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은 미술가와 수많은 반응을 교환하며 특성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하나의 ‘존재하는 주체’이다. 나는 이것이 고양이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다르지만, 서로에게 반응하고 그 반응이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둘 모두 주체(performer)이자 객체(performed on)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네가 알루미늄 판을 사서 자르고, 프레임을 달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준비했으니 네가 그것을 ‘창조’한 것 아니냐”고. 나는 그 과정이 창조, 혹은 적어도 창조의 일부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내가 미술가로서가 아니라 공예가(craftsman)로서 수행한 일이다. 공예가는 객체를 ‘출산’할 수 있고, 미술가는 주체와 상호작용한다. 나는 여기서 공예와 순수미술에 대한 논쟁을 촉발할 생각도 없고,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우위는 없다. 단지 ‘계획된 결과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내가 이해하는 회화적 과정이 대비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공예에서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반면 회화에서는 과정이 특정한 시각적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과정 중에 (미술가와 그림 양쪽에서) 제안되는 ‘변동’이 회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림이 ‘주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랜 회화의 역사 속에서, 많은 관람자는 그림의 주제를 찾고 읽으려 했다. 마치 미술가가 보낸 메시지를 해독하듯이 말이다. 반면 많은 추상화가들은 회화 속에 어떠한 주제도 존재하는 것을 반대했다. 잘 알려진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새로운 아카데미를 위한 열두 가지 규칙은 ‘순수한’ 회화는 객체도, 주체도, 재료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작업에서 주제를 제거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그림을 특정한 메시지가 필요 없는 단순한 객체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주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림을 주체로 대한다는 것은, 미술가와 동등한 존재로 대한다는 뜻이다. 두 개의 의자가 서로 마주 보고 놓여 있고, 한쪽에 미술가가, 다른 한쪽에 그림이 앉아 있는 것이다. 미술가는 말하는 만큼 들으려고 노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화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미술가는 양쪽에서 나오는 반응이 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또 다른 반응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핀다.

타미 응우옌(Tammy Nguyen)과의 스튜디오 비지트(줌 통화) 이후

객체로서의 주체, 혹은 주체로서의 객체

스튜디오 비지트에 대해 쓰기에 가장 좋은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줌 통화 이후로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다. 타미가 다가오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몇 달 전에 아이를 출산했다고 말했을 때, 알렉산드리아가 타미에게 (농담이지만 존중하는 태도로) 타미가 많은 것들을 ‘출산’해왔다고 말했다. 여러 작품들을 만들었고 아이도 낳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한동안 붙잡고 있었다. 최근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한 번도 무언가를 ‘출산’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내가 출산을 걱정하며 살아본 적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술가로서도, 최근의 내 작업들은 내 몸에서 나온 결과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것들을 내가 만든 창조물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올여름에 깨달음을 얻었던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혼자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번역·언어·말하기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어떻게 회화 작업에 반영되는지 탐구해왔다. 올여름 이전까지 내가 도달한 가장 멀리 간 지점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는 회화 절차인 혼자말을 구축한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혹은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캔버스에 자국을 남기고, 듣는 사람(혹은 읽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림에서 물러나 방금 내가 한 행동을 이해하려 한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 과정에 타이머를 설정해, 한 시간은 쓰고 한 시간은 읽도록 스스로에게 강제했다. 이렇게 하나의 회화 위에서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레이어가 쌓이고, 내가 (쓰기와 읽기 사이에서) 놓이는 맥락 또한 변화했다. 작가와 독자는 매번 새로운 맥락에 위치하게 되고, 한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의 ‘번역’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나는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들은 것에 기반해 또 다른 말을 하고…”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를 계속 번역하고 있었다.

혼자말을 수행할 때, 나는 내가 스스로와 대화한다고 믿었다(다른 맥락에 놓인 또 다른 버전의 나와). 그리고 회화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산물처럼 생성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난여름 나는 이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와 대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읽기 세션 동안 나는 그림(혹은 물감 자체)이 어떻게 움직이길 원하는지를 신중하게 이해하려 애썼다. 이것은 마치 우리집 고양이 프레디와 대화를 시도하며, 프레디가 왜 내게 등을 비비는지 알아내려 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받았고, 그 반응을 해석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해석에 기반해 다시 반응했다. 나는 내가 ‘혼자말’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나와 그림 사이에서 주고받은 반응의 연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의 ‘의지’를 나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그림 또한 내 의지에 반응한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인식은 그림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그림을, 단순히 미술가의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아닌, 미술가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수행자(perfomer)로 보고 있다.

다시 타미의 작품을 ‘출산’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말로 돌아가자면, 내가 지금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주체를 ‘출산’한다는 것은 꽤 이상한 상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고양이를 ‘출산’한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작업하는 알루미늄 판은 물감이 닿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온다. 그것은 전능한 미술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은 미술가와 수많은 반응을 교환하며 특성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하나의 ‘존재하는 주체’이다. 나는 이것이 고양이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다르지만, 서로에게 반응하고 그 반응이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둘 모두 주체(performer)이자 객체(performed on)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네가 알루미늄 판을 사서 자르고, 프레임을 달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준비했으니 네가 그것을 ‘창조’한 것 아니냐”고. 나는 그 과정이 창조, 혹은 적어도 창조의 일부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내가 미술가로서가 아니라 공예가(craftsman)로서 수행한 일이다. 공예가는 객체를 ‘출산’할 수 있고, 미술가는 주체와 상호작용한다. 나는 여기서 공예와 순수미술에 대한 논쟁을 촉발할 생각도 없고,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우위는 없다. 단지 ‘계획된 결과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내가 이해하는 회화적 과정이 대비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공예에서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반면 회화에서는 과정이 특정한 시각적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과정 중에 (미술가와 그림 양쪽에서) 제안되는 ‘변동’이 회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림이 ‘주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랜 회화의 역사 속에서, 많은 관람자는 그림의 주제를 찾고 읽으려 했다. 마치 미술가가 보낸 메시지를 해독하듯이 말이다. 반면 많은 추상화가들은 회화 속에 어떠한 주제도 존재하는 것을 반대했다. 잘 알려진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새로운 아카데미를 위한 열두 가지 규칙은 ‘순수한’ 회화는 객체도, 주체도, 재료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작업에서 주제를 제거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그림을 특정한 메시지가 필요 없는 단순한 객체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주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림을 주체로 대한다는 것은, 미술가와 동등한 존재로 대한다는 뜻이다. 두 개의 의자가 서로 마주 보고 놓여 있고, 한쪽에 미술가가, 다른 한쪽에 그림이 앉아 있는 것이다. 미술가는 말하는 만큼 들으려고 노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화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미술가는 양쪽에서 나오는 반응이 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또 다른 반응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핀다.

  • 2025

    타미 응우옌(Tammy Nguyen)과의 스튜디오 비지트(줌 통화) 이후

    객체로서의 주체, 혹은 주체로서의 객체

    스튜디오 비지트에 대해 쓰기에 가장 좋은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줌 통화 이후로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다. 타미가 다가오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몇 달 전에 아이를 출산했다고 말했을 때, 알렉산드리아가 타미에게 (농담이지만 존중하는 태도로) 타미가 많은 것들을 ‘출산’해왔다고 말했다. 여러 작품들을 만들었고 아이도 낳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한동안 붙잡고 있었다. 최근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한 번도 무언가를 ‘출산’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내가 출산을 걱정하며 살아본 적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술가로서도, 최근의 내 작업들은 내 몸에서 나온 결과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그것들을 내가 만든 창조물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생각은 올여름에 깨달음을 얻었던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혼자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 번역·언어·말하기에 대한 나의 관심이 어떻게 회화 작업에 반영되는지 탐구해왔다. 올여름 이전까지 내가 도달한 가장 멀리 간 지점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는 회화 절차인 혼자말을 구축한 것이었다. 말하는 사람(혹은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캔버스에 자국을 남기고, 듣는 사람(혹은 읽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림에서 물러나 방금 내가 한 행동을 이해하려 한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 과정에 타이머를 설정해, 한 시간은 쓰고 한 시간은 읽도록 스스로에게 강제했다. 이렇게 하나의 회화 위에서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레이어가 쌓이고, 내가 (쓰기와 읽기 사이에서) 놓이는 맥락 또한 변화했다. 작가와 독자는 매번 새로운 맥락에 위치하게 되고, 한 맥락에서 다른 맥락으로의 ‘번역’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나는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듣고, 들은 것에 기반해 또 다른 말을 하고…”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를 계속 번역하고 있었다.

    혼자말을 수행할 때, 나는 내가 스스로와 대화한다고 믿었다(다른 맥락에 놓인 또 다른 버전의 나와). 그리고 회화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산물처럼 생성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난여름 나는 이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나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와 대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읽기 세션 동안 나는 그림(혹은 물감 자체)이 어떻게 움직이길 원하는지를 신중하게 이해하려 애썼다. 이것은 마치 우리집 고양이 프레디와 대화를 시도하며, 프레디가 왜 내게 등을 비비는지 알아내려 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받았고, 그 반응을 해석해야 했다. 그리고 그 해석에 기반해 다시 반응했다. 나는 내가 ‘혼자말’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나와 그림 사이에서 주고받은 반응의 연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의 ‘의지’를 나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그림 또한 내 의지에 반응한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 인식은 그림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그림을, 단순히 미술가의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가 아닌, 미술가와의 대화에 참여하는 수행자(perfomer)로 보고 있다.

    다시 타미의 작품을 ‘출산’한다는 알렉산드리아의 말로 돌아가자면, 내가 지금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주체를 ‘출산’한다는 것은 꽤 이상한 상상이다. 이미 존재하는 고양이를 ‘출산’한다고 상상하는 것과 같다. 내가 작업하는 알루미늄 판은 물감이 닿기 전부터 이미 존재해온다. 그것은 전능한 미술가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것은 미술가와 수많은 반응을 교환하며 특성이 형성되고 변화하는 하나의 ‘존재하는 주체’이다. 나는 이것이 고양이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다르지만, 서로에게 반응하고 그 반응이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둘 모두 주체(performer)이자 객체(performed on)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네가 알루미늄 판을 사서 자르고, 프레임을 달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준비했으니 네가 그것을 ‘창조’한 것 아니냐”고. 나는 그 과정이 창조, 혹은 적어도 창조의 일부로 보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내가 미술가로서가 아니라 공예가(craftsman)로서 수행한 일이다. 공예가는 객체를 ‘출산’할 수 있고, 미술가는 주체와 상호작용한다. 나는 여기서 공예와 순수미술에 대한 논쟁을 촉발할 생각도 없고, 어느 쪽이 더 우위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우위는 없다. 단지 ‘계획된 결과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내가 이해하는 회화적 과정이 대비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공예에서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반면 회화에서는 과정이 특정한 시각적 이미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과정 중에 (미술가와 그림 양쪽에서) 제안되는 ‘변동’이 회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림이 ‘주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랜 회화의 역사 속에서, 많은 관람자는 그림의 주제를 찾고 읽으려 했다. 마치 미술가가 보낸 메시지를 해독하듯이 말이다. 반면 많은 추상화가들은 회화 속에 어떠한 주제도 존재하는 것을 반대했다. 잘 알려진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새로운 아카데미를 위한 열두 가지 규칙은 ‘순수한’ 회화는 객체도, 주체도, 재료도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작업에서 주제를 제거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나는 그림을 특정한 메시지가 필요 없는 단순한 객체로 다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의견을 가질 수 있는 주체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림을 주체로 대한다는 것은, 미술가와 동등한 존재로 대한다는 뜻이다. 두 개의 의자가 서로 마주 보고 놓여 있고, 한쪽에 미술가가, 다른 한쪽에 그림이 앉아 있는 것이다. 미술가는 말하는 만큼 들으려고 노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회화를 ‘과정’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미술가는 양쪽에서 나오는 반응이 서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또 다른 반응으로 이어지는지를 살핀다.